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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 에 대한 검색 결과로서 총 13건 이 검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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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대 신영수 명예교수 회고록 출간 - 세계보건 최전선에서 WHO와 함께한 10년 기록 서울의대 신영수 명예교수는 지난 30일, 신간 다시, 가지 않은 길 위에 서다를 출간했다. 이번 회고록은 WHO 서태평양지역 총장으로서 인류 보건 향상을 위해 노력한 그의 10년간의 여정을 담았다. 누구에게나 친숙하지만, 자세히 알기 어려운 세계보건기구의 활동과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신 교수는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임상의 대신 예방의학의 길을 택해 국민 의료보장을 위해 앞장서왔다. 서울대병원 기획조정실장,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을 역임했다. 1983년부터 국제보건분야 전문가로 활동영역을 넓혀, 정년 퇴임 이후에는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총장에 당선돼 10년 간 세계 보건과 인류 건강 수호를 위해 힘썼다. 이번 신간이 예방의학과 세계보건기구에 관심있는 의학도 및 일반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책 소개 서울대학교 신영수 박사가 WHO 서태평양지역 지역총장에 당선되어 10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할 때까지 바쁘게 살았던 날들을 정리, 기록한 이야기들 WHO는 마치 물과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있지만 평소에는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존재 중 하나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접어들면서 WHO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WHO는 어떤 기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우리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다면 다시, 가지 않은 길 위에 서다를 펴보면 된다. 이 책은 일찍이 남들이 가려 하지 않는 예방의학의 길에 서서 전 국민 의료보장을 위해 힘써왔고, 은퇴 후에는 다시 WHO서태평양지역 지역총장으로서 인류 보건 향상을 위해 몸을 바친 신영수 박사의 삶을 통해 WHO의 속살까지 가감없이 보여준다. ☐ 출판사 리뷰서울대 의대 졸업, 예일대 박사학위 취득. 신영수 박사는 우수한 성적과 최고의 학력으로 어떤 분야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던 예방의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30대에 서울대학교병원 기획조정실장을 시작으로 서울대학병원 부설 병원연구소 창설, 의료관리연구원장을 거쳐 마침내 세계 보건의 중심인 WHO 서태평양지역(WPRO) 지역총장에 당선되었다. 다시, 가지 않은 길 위에 서다라는 제목은, 쉽고 편안한 은퇴 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한 번 인류 보건을 위해 남들이 가지 않은 길 위에 선 신영수 박사의 강한 인류애를 담고 있다. 신영수 박사가 재임했던 10년 동안 서태평양 지역의 보건지표는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객관적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모성사망률 33퍼센트, 아동사망률 65퍼센트가 줄었고, 결핵 사망률은 29퍼센트가 줄었다. 신 박사가 특히 힘을 기울였던 B형 간염은 신생아 백신 접종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면서 700만 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말라리아 퇴치와 보편적 의료보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의 보건지표들이 향상되었다. 다시, 가지 않은 길 위에 서다는 인류 보건을 위해 힘써 온 신영수 박사의 학창시절부터 WHO 서태평양지역 지역총장에 당선되기까지 삶의 이야기, 재임기간 동안 펼쳤던 활약상 그리고 WHO의 비하인드스토리 등을 날카롭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세계를 휩쓸고 간 사스와 메르스 등 팬데믹에 대한 WHO의 대처를 통해 코로나19 팬데믹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예방의학과 세계보건기구 WHO에 관심 있는 의학도 및 일반인들이 꼭 한번씩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 작가의 말이 책은 내가 뜻하지 않게 WHO 서태평양지역 지역총장에 당선되어 10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할 때까지 무척 바쁘게 살았던 날들을 정리, 기록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30대 젊은 나이에 WHO 지도자들을 만났던 인연으로 오랜 기간 WHO와 가까이 지냈다. WHO를 통해 나의 절친이 된 이종욱이 WHO 사무총장에 당선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도왔다. 그가 당선된 이후에는 그를 멀리하는 것이 그를 돕는 길이라 생각하고 WHO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임기 시작 3년 만에 비명에 떠난 그가 다시 나를 WHO로 불러낸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이 책 제1부, 다시, 가지 않은 길 위에 서다에 나온다. 제1부 제목을 다시, 가지 않은 길 위에 서다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WHO 선거에서 당선된 뒤 나를 무척 아껴주시는 의대 선배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자네 일생 동안 남들(다른 의사들) 안 가는 길만 골라 다니더니 이번에 또 큰 사고를 쳤네. 아무튼 축하하네 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의사로서 40년간 걸어온 길이 늘 그러하였다. ☐ 작가 소개 신영수(申英秀) 1943년 10월 15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재학 시절 출중한 성적 덕분에 어떤 과든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많은 의대생들이 가고 싶어하는 임상의의 길 대신 전 국민 의료보장을 위한 길을 택했다. 1977년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78년부터 2009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두 차례, 7년여에 걸쳐 특수법인 발족 초창기 서울대학교병원 기획조정실장을 맡았다. 1980년 서울대학교병원 부설 병원연구소를 창설하고 1992년 그 후신인 한국의료관리연구원 원장을 맡아 정책연구를 통한 전 국민 의료보장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1987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국내 최초로 설립된 의료관리학교실의 초대 주임교수와 서울대학교 지역의료체계 시범사업단 단장을 역임했다. 1983년부터는 WHO와 관련된 국제보건분야 전문가로 활동영역을 넓혔고, 1995년부터 3년간 제네바 WHO 본부 집행이사회 이사로 활동했다. 1990년대 후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설립을 주도하고 2002년 원장직을 맡아 그 기초를 다졌다. 서울의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후,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WPRO) 지역총장에 당선되어 10년 동안 세계 보건과 인류의 건강 수호를 위해 일했다.201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7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을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 병원소개 > 병원소식 > 병원뉴스
정확도 : 98% 2021.12.07

[신간안내] 제중원 이야기1. 책소개“사람을 구하여, 새 나라를 열라”조선 최초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둘러싼 비밀이 밝혀진다'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 광혜원이라 했으나, 곧 '사람을 구하는 집'으로 이름을 바꾼 제중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으로만 기억되던 이곳에 새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국립병원이 탄생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그동안의 역사 서술에서 빠뜨렸던 조선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다. 하나의 국립병원이 탄생하고, 운영되고, 운영권이 이관되는 과정을 살펴보며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역사 서술에서 빠뜨렸던 무수한 이야기들이다. 천민에서 국왕까지, 푸른 눈의 서양인에서 청나라와 일본까지. 신분제 사회가 흔들리고, 나라의 대문이 흔들리는 이야기들. 하나의 병원 안에서 조선 격변기의 가장 드라마틱한 구도들이 뒤엉켜 있다. 고종 재위 44년, 회색빛으로 기억되던 망국의 역사. 그러나 제중원의 복원으로 구한말이 화려한 색채를 되찾는다. 신구新舊, 귀천貴賤, 동서東西가 뒤엉켜, 근대를 향한 첫 번째 꿈을 꾸었던 곳. 정치, 사회, 문화 등 조선 근대화를 이해하는 방식을 뒤집는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만난다. 경술국치 100년, 망국의 조선을 새롭게 발견하다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출판계에는 『덕혜옹주』,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등이 출간되어, 그 100년의 시기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진 반일감정은 유사 이래 계속 되었던 침략이 그 원인이지만 역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일제 강점기에 겪은 민족적인 치욕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치욕적인 역사로만 기억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제중원 이야기-새 시대를 향한 열망이 들끓던 곳』의 저자 김상태 교수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이 시기에 우리가 새롭게 기억해야 할 것은 새로운 근대 국가를 만들어가려던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을 비롯한 조선인들의 노력이다. 이 기간 동안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대부분의 근대적인 시스템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있다. 고종은 왜 서양식 국립병원을 원했는가그 끝이 '한일합방'이었기에 비운으로 기억되는 구한말. 그러나 사실 그 시기만큼 격동적이고 화려했던 시기도 없었다. 천민에서 국왕까지, 푸른 눈의 서양인에서 청나라와 일본까지. 신분제 사회가 흔들리고, 나라의 대문이 흔들리는 이야기들. 이 핵심에 바로 1885년에 탄생한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이 있다. '백성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의 제중원의 이름을 지은 이는 바로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 유약한 군주로 우리는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만만찮은 군주였다. 그의 '동도서기'론은 아주 견고한 신념이었고, 그는 그 신념을 실천에 옮길 의지도 있었으며, 노력도 기울였다. 역사책에서 접했던 그 많은 기관들의 이름들. 통리기문아문, 별기군, 기기창, 전환국, 박문국, 우정국, 육영공원, 연무공원 등 이 모든 것이 고종의 총체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그 중 고종은 근대적 국립병원을 만들면서 그것을 '서양의 의학 기술'로 운영하고자 했다. 한 왕조의 마지막을 이끌던 왕이 '새것'을 끊임없이 원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선교 의사 알렌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제중원 속에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자 했던 한 나라의 꿈과 근대적 개인을 꿈꾸는 개인들의 열망이 가득하다. 역사적 우연을 재발견하다제중원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역사 서술에서 빠뜨렸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이 제중원의 설립이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민씨 가문의 황태자, 민영익이 자상을 입고, 이를 중국에서 병원을 실패하고 조선으로 도망치듯 와 있던 알렌이라는 서양 의사가 치료한 것이 바로 역사적 드라마의 시작이다. 급진개혁파의 정치적 혁명은 실패했으나, 그로 인해 조선인들의 삶을 뒤흔드는 서양 의학의 보급이 국가를 통해 가능하게 된, 필연 같은 우연들이 제중원을 통해 재발견된다. 또한 제중원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미국, 일본, 청국의 헤게모니 구도를 보다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다. 제중원의 설립과 운영 과정, 그리고 이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의 운영권 이관 등을 통해, 당시 조선 정부가 미국에 가지고 있었던 '짝사랑'에 가까운 우호감, 조선의 근대화 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청국의 횡포, 그리고 이 작은 병원 하나를 일본으로 넘겨주지 않고 보통의 조선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두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의료라는 코드를 통해 개화기를 다시 읽다『제중원 이야기』 속에는 그동안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선교사들의 일기와 편지 등 여러 가지 사료를 통해 독자들을 그 시기의 생생한 현장으로 데려 간다. 서양 의학서들을 구해 읽던 조선 말기 지식인들의 노력, 사람의 살을 찢고 꿰맨 장면을 처음 본 조선인들이 받은 충격, 춘원 이광수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당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콜레라 이야기, 말라리아 치료제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금계랍(키니네)' 등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뿐만 아니라 1883년 미국 대통령의 초청에 의해 미국을 방문하여 근대 문물을 직접 보고 보고 온 보빙사 일행 중 한 명인 최경석이 경기하는 서양 아이를 침으로 치료한 일, 제중원에 처음으로 배치된 5명의 의녀를 기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희롱하거나, 청나라에 팔려가게 만든 일 등 그 시기의 사람들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2. 미리보기화려한 자리였다. 조선의 주요 관리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주요 해외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영국 영사 윌리엄 애스턴William G. Aston, 미국 공사 루셔스 푸트Lucius H. Foote, 청나라 공사 진수당陳樹棠, 청나라가 파견한 독일인 외교ㆍ재정 고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llendorf도 참석했다.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18명의 참석자는 일본인 요리사가 장만한 양식 요리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다만 민영익과 묄렌도르프만이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김옥균은 식사 중에도 여러 차례 들락날락하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알렌은 민영익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왕실과 정부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의 관심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조선인들에게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 서양 의술의 위력이 입증되면서 갑신정변 중에 부상을 입은 조선인들과 청나라 병사 등 많은 사람들이 알렌에게 몰려들었다. 어떤 이가 죽은 시계를 갖고 와서 고쳐달라고 조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청나라 병사들은 알렌의 단골 환자들이었다. 청나라 병사들은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 나간 상처에 막 죽인 개의 가죽을 감고 찜질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사실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터였다. 알렌은 청나라 부상병들을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효험을 본 병사들은 대놓고 알렌을 “예수 박사”라고 불렀다. 1885년 4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을 연 서양식 국립병원의 첫 이름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개원 후인 4월 12일에 지어졌다. 이 이름은 조선 초기의 제생원濟生院이나 1882년에 폐지된 혜민서, 활인서와 같은 조선 시대 전통 의료 기관의 이름을 계승한 것이었다. (...) 그런데 그로부터 2주일 후인 4월 26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고종에게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명하자고 했다. 고종은 이를 즉시 재가裁可하여 이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이 되었다. '제중'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준말로,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광혜원이나 제중원이나 그 뜻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 굳이 이름을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알렌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진료 목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제중원 개원 직전인 1885년 3월 27일이었다. 그들은 유사 천연두에서 막 회복된 상태였는데, 그 후유증으로 고종은 인후가, 명성황후는 귀가 부어 있었다. (...) 알렌이 명성황후를 비교적 가까이서 진료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명성황후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때도 환관 한 사람이 칸막이를 통해 천으로 감싼 명성황후의 팔을 내밀었다. 명성황후의 팔뚝은 모두 명주 천으로 싸여 있었고 다만 맥을 짚을 1.5센티미터 정도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혀를 칸막이에 뚫린 구멍으로 내밀었다. 양의洋醫도 한의韓醫처럼 양쪽 팔목의 진맥을 하고, 혀를 살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 지은이 : 김상태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근현대사를 연구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저물어가던 역사로만 기억되던 근대 시기에 마음이 끌렸다. 박사 과정 당시 《윤치호 일기》를 편역하면서 근대사를 더 깊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고, 흑백 사진의 느낌만 있는 구한말에 다채로운 색을 입힐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005년부터 메디컬 히스토리를 연구했다. 이때 재발견한 제중원은 개항기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일기와 편지를 비롯, 그동안 사료적 가치를 평가받지 못했던 많은 기록들을 세밀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며, 논문에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지은 책으로 《윤치호일기 1916~1943》(편역), 《역사신문 5권》(공저),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3권》(공저), 《한국의학인물사》(공저),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공저)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 병원소개 > 병원소식 > 병원뉴스
정확도 : 98% 2010.03.03

임상시험센터, WHO에서 후원하는 새로운 말라리아 치료제의 제1상 임상시험 성공리에 수행 Pyronaridine-artesunate (Pyro-arte) 프로젝트의 제1상 임상시험은 4개의 세부시험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임상시험으로서, 국제적인 비영리 재원조달을 통한 의뢰를 받아 임상약리실장 장인진 교수 책임 하에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시험센터(센터장 신상구 교수)에서 작년부터 수행되어 왔으며,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다. 본 연구결과에 대하여 의뢰자인 MMV 및 WHO 측은 자료의 질 및 연구 결과에 대하여 매우 만족해하고 있으며, 지난 달 국제학회에서도 발표되었고, 이를 토대로 하여 최근 제2상 임상시험이 6개국에서 시작되었다. 본 Pyro-arte 프로젝트의 의의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신약개발 임상시험 과제를 국제적 재원조달에 의하여 국내에서 수행하였으며, 높은 수준의 결과를 생성하여 공인 받았다는 데 있다. 특히 작년 말 보건복지부 지역임상시험센터로 처음 지정 받은 바 있는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시험센터로서는 국제적 수준의 임상시험을 보다 많이 지속적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는 데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참고로 말라리아는 전세계적으로 매년 5억 명의 환자가 발생하며 연간 200만 명의 사망자 중 대부분이 5세 미만의 어린이라는 점에서 최우선의 구제대상질환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기존 치료제에 대한 내성 발생으로 인하여 새로운 항말라리아제의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한편 MMV (Medicines for Malaria Venture)는 새로운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하고 보급하기 위하여 WHO (세계보건기구) 및 빌게이츠 재단 등이 출연하여 만든 국제적 비영리기구이다. MMV에서 진행하는 수많은 프로젝트 중 현재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것이 Pyro-arte 프로젝트인데, 신풍제약과 MMV가 공동으로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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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도 : 99% 200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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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중원 설립, 우연인가 필연인가? 한성중보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한성순보 기사(1884.3.27.) 1884년 12월 4일 저녁,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가 벌어졌다. 조선 정부의 고위관리와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이 연회가 끝나갈 무렵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찔려 죽어갔다. 역사적 대사건인 갑신정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그는 당시 일본인 의사를 제외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유일한 서양식 의사였다. 그는 민영익을 정성껏 치료하여 완치시킴으로써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여세를 몰아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을 제안했는데, 조선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럼 제중원 설립은 역사적 우연인가? 아니다. 역사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시 조선에서 서양 근대의학의 수용과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9세기에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서양의학에 관심이 많아 여러 저술을 남겼다. 1877년 부산에는 제생의원(濟生醫院)이라는 서양식 일본인 병원이 생겨 조선인들도 진료했다. 지석영은 종두법을 익힌 후 1879년 역사적인 종두 시술에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고종과 조선 정부가 서양 근대의학의 도입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그 실천에 나섰는데, 이때 의료 근대화에도 주목했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견문단(朝士見聞團)을 통해 서양식 의료를 탐색했다. 이듬해에는 전통의학에 기초한 국립 의료기관이었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폐지하여 국가 의료정책의 전환을 모색했다. 1884년 정부 기관지 《한성순보》를 통해 백성들에게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 해에 미국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하자 이를 허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신정변 때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사건은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2. 제중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1885년 4월 고종과 조선 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약칭 외아문, 지금의 외교부) 산하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당연히 외아문에서 병원 명칭을 지어 고종의 재가를 받았는데, 그 최초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2주일 만에 이를 무효화하고 ‘제중원(濟衆院)’이라고 새로 명명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제중원이라고 부른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이 되어버린 홍영식의 집(관행상 국가 재산이 되어 있었음,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을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하도록 했다. 넓은 한옥이었기에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 대기실 등 기본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제중원 진료가 시작되어 환자들이 늘어나자,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86년 10~11월경 제중원을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옮겼다. 고종은 외아문 독판(督辦, 지금의 장관)이나 협판(協辦, 지금의 차관)에게 병원장 격인 제중원 당상(堂上)을 겸임시켰다. 그래서 온건개화파의 대표적 인사인 김윤식을 시작으로 민종묵, 남정철 등 외무 관료들이 제중원 운영을 총괄 지휘했다. 외국어에 능숙하고 서양 정세에 밝은 젊은 관리들은 제중원 주사(主事)로 발령을 받았다. 특히 제중원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최초 국립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 출신들이 배치되었는데, 고종과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거는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 서양 의술을 갖춘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알렌에게 환자 진료를 맡겼다. 그 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헤론(John W. Heron), 하디(Robert A. Hardie), 빈턴(Cadwallader C. Vinton), 에비슨(Oliver R. Avison) 등 선교사 겸 의사들이 제중원 의사로 고용되어 근무했다. 개원 당시의 제중원 3. 제중원, 조선인 환자를 치료하다 제중원에서 치료한 환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1886년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은 개원 이래 첫 1년 동안 1만 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일반 백성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걸인, 나병 환자로부터 위로는 궁궐의 귀인까지 조선의 전 계층이 망라되어 있었다. 여성 환자들도 800명이 넘었다.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제중원에서 첫 1년 동안 치료했던 환자들의 주요 질환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많았다. 소화불량, 각종 피부병, 성병(매독) 등도 많은 편이었다. 그밖에도 결핵, 나병, 기생충병, 각기병 등이 있었다. 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는 모두 150명이었는데, 팔과 다리 등의 절단 수술이 많았다. 괴사병 환자의 대퇴골 절제수술, 척추골 수술 같은 대수술도 있었다. 백내장 수술도 열 건이나 되었다. 입원 환자 중 폐렴 환자, 각기병 환자 등 일곱 명은 사망했다. 조선 정부가 마련한 제중원 운영규칙 4. 국립 ‘제중원의학당’, 서양의학을 가르치다 1886년 3월 29일, 의사 양성을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었다. 당시 조선 정부의 근대 인재 양성 프로젝트는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883년 영어 통역관 양성을 위해 동문학을 세웠고, 1886년 이를 육영공원으로 발전시켰다. 1888년에는 사관생도 양성을 위해 연무공원을 개설했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학당 운영지침을 마련하고 부지와 건물을 제공했으며, 학생들을 선발했다. 제중원 의사 알렌은 조선 정부 예산으로 의학교육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고, 교수들을 섭외했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 16명의 학생을 선발하고, 그중 12명을 본과에 올려 보냈다. 학생들은 영어, 물리, 화학, 해부 등 기초과목은 물론 의료기구 사용법, 약 조제법, 환자 간호법 등을 배웠다. 수업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성적 우수자는 표창을 받았고, 중도 퇴학은 외아문 독판과 교수회(敎授會)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1890년 무렵 아쉽게도 제중원의학당의 의학교육은 중단되었고, 결국 졸업생은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한 의학당 운영예산의 부족, 알렌 등 미국인 교수진의 이탈, 학생들의 선교사 및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학생들의 학구열 부족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외아문 독판 겸 제중원 당상 김윤식 5. 조선에서 가장 안쓰러운 군주, 고종 고종 하면 우리는 보통 비운의 국왕이라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만만찮은 군주였다. 그의 동도서기론은 상당히 견고한 신념이었고, 그 신념을 실현에 옮길 의지도 있었으며 노력도 기울였다. 제중원을 비롯해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기기창, 우정국, 육영공원, 연무공원 등은 고종의 총체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조선에서 가장 안쓰러운 군주이기도 했다. 그의 시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질 여유도 없을 만큼, 주변 상황이 조선과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가 옳다고 믿는 사상과 정책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여건이 너무 나빴다. 제중원이 운영되었던 1885~1894년만 살펴보더라도,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너무 심했고 조선을 마치 식민지처럼 다루었다. 위안스카이는 총독처럼 위세를 부리며 고종의 폐위까지 시도했다. 고종이 청나라의 눈을 피해 근대화와 자주화를 도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정부의 재정난도 심각했다. 19세기 내내 기근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나라의 곳간 사정이 신통치 않았는데, 문호개방 이후 쌀값이 폭등하고 청나라의 각종 경제침탈이 거세지면서 정부의 돈줄이 말라버렸다. 고종 곁에는 함께 근대화 정책을 펼쳐갈 인재와 지지세력 마저 없었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김윤식 등 온건개화파는 청나라를 보는 시각이 고종과 달랐던 나머지 고종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조선 정부가 구상했던 수많은 근대화 정책이 알찬 결실을 맺을 리 없었다. 제중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국립병원 제중원을 설립한 고종 6. 파란만장했던 1894년 하물며 1894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해였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전쟁, 그로 인해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갑오개혁. 세 개의 사건 모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국제관계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대사건들이었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그 중 어느 한 사건만 일어났어도 감당하기 어려울 판이었는데, 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사건은 고종에게는 치명타였다. 고종은 국왕으로서의 자존심과 권위에 큰 타격을 입고 자연인으로서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아야 했다. 조선 정부도 온전한 정부로서의 권위와 기능을 상실한 채 외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선 정부가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공식 승인한 날짜다. 1894년 9월 26일은 일본에 의한 타율적 개혁인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즉 일본이 조선의 국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894년 11월 20일, 알렌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F. F. Ellinwood)에게 보낸 편지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알렌은 제중원 문제를 전적으로 자신이 해결했다고 자부했다. 9월 26일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승인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알렌은 일본이 제중원을 원하는 바람에 문제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일본이 제중원을 수중에 넣고 싶어 했던 것이다. 실제로 1890년에 일본인들이 제중원 진료권을 넘겨받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알렌은 이런 상황이 잘 해결되어 미국북장로회에서 제중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만족할 만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본도 저를 고맙게 여기는 한편, 국왕(고종은)은 제가 조선을 구했다고 계속 말하고 있다”면서 이 내용은 극비사항이라고 덧붙였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알렌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자의 의견을 교환하고 조정하는 데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다. 7. 고종(조선 정부)이 제중원을 위탁 운영한 까닭 그렇다면 알렌은 제중원에 관해 고종(조선 정부)과 일본의 동의를 어떻게 이끌어냈을까? 거꾸로 말하면 고종(조선 정부)과 일본이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준 이유는 무엇일까?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일본이 조선의 국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제중원을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미국북장로회에 운영을 위탁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더구나 고종과 온건개화파 관료들은 일찍부터 미국이 사심 없이 약소국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라고 기대했던 만큼, 청일전쟁 국면에서 미국에게 무언가 도움을 청하기에 제중원 운영권 이관이 유리한 카드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일본도 조선을 순조롭게 장악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외교적으로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론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895년 2월 내무대신 박영효가 언더우드와 에비슨에게 명성황후의 지원을 받는 국립대학 설립 구상을 상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영효가 국립대학 설립을 선교사업으로 ‘위장’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립대학을 조선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사업으로 시작하면 일본인들의 간섭을 받아 실패하거나 그들에게 학교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서였다. 이로 미루어볼 때 고종이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준 것은 조선 정부가 계속해서 제중원을 운영할 경우 일본인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했던 데서 나온 고육지책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더욱 심증이 간다. 1894년 9월 26일 이후 에비슨은 제중원을 단독 운영했다. 동시에 그는 미국북장로회 소유의 병원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1904년 에비슨 등은 제중원을 떠나 서울 남대문 인근에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했다. 이듬해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 보수 비용을 지불하고 제중원 부지와 건물(1886년 11월경 조선 정부는 제중원을 을지로 입구로 이전했음)을 환수했다. 대한제국의 제중원 환수 약정서 8. 결론: 제중원은 왜 중요한가? 우리나라 근현대 의료사, 특히 서양식 의료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이 개원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중원은 고종과 조선 정부가 19세기 조선의 제반 의료 상황에 대처하여 서양의학 도입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877년 부산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서양식 병원이 등장했고, 1879년 송촌 지석영이 역사적인 종두 시술에 성공했지만, 왕조시대였던 만큼 어명으로 서양식 병원이 설립되어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상대로 서양식 의료를 펼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근대 의료사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중원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한국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우선 대한제국 정부의 의학교와 광제원을 통해서였다. 정부와 한국인들이 제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은 의학교와 광제원 등 국립 의료기관의 설립과 운영, 나아가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의학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경로는 세브란스병원을 통한 것이었다. 제중원에서 일했던 여러 의료선교사들의 경험은 개신교에서 설립하고 운영한 세브란스병원의 발전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의학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개항기 국립병원 계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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